청량대운도 淸凉大雲圖 이야기

서울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다
180일 동안의 강행군 이었다. 난생 처음이자 어딜가서 구경 해보거나 조언 조차 구할 길 없는 일을 시작 했다. 서울 정도 600년을 수년 앞둔 시점 부터 불현듯 머리속에 맴돌던 일이었다. '화가인 나도 역사적인 그날 무언가 축하하고 기념할 만한 작품을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아 3년을 고심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시작된 청량대운도 이다. 작품은 서울정도 600년 야송화전(예술의전당)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청송야송미술관에 기증돼 보관되어 오다가 2013년 전시관 개관 이후 누구나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되고 있다. 야송은 '청량대운도' 작품 제작 전 과정을 300쪽 분량의 일기로 남길 정도로 정성을 다했었다.
1993년작, 청량대운도, 46m x 6.7m
백발이 되다
길이 46m 높이 6.5m의 대작 청량대운도는 명산 청량산을 그려낸 실경산수화의 걸작이다.
그가 1989년 부터 청량산 곳곳을 헤메이며 구상하기 시작한 이 작품은 1992년 10월에서나 완성될 만큼 오랜 시간의 고뇌와 혼신의 노력으로 완성된 야송 일생의 역작일 뿐만 아니라 예술 혼이 깃든 작품이다.
전지 400매 분량이 쓰였으며 그림 위에 1,700여 자를 적어 넣을 만큼 직접 보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작이다.
때문에 마땅한 작업 장소를 구하기 어려워 수소문하다가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의 양곡 저장 창고를 빌려 작업을 시작 하였다.
청량대운도를 그려내기 위해 붓을 손에 쥔 뒤로는 끼니 거르기가 다반사 였고 잠을 이루지 못하며 밤이고 낮이고 강행군 하였다.
이런 일상이 6개월간 지속되어 지치고 혹사한 육신은 여기저기가 편한 곳이 없었다.
결국 그림이 완성될 때 즈음 검었던 머리가 재가 되어 버린듯 하얗게 새어 백발이 되었다.
이러한 숱한 곡절 끝에 탄생한 작품 이기에 야송의 분신과도 같을 뿐만 아니라 한국화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청량대운도 화기
평소에도 대작을 즐기나 나이가 들매 초대작을 그리고 싶을 때, 또 그릴수 있을 때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차 청량대운도 길이 45미터60센티, 높이 6미터50센티를 그려보고자 마음을 정한 것은 3년전 일이다. 막상 전지 4백여장의 화선지를 편하게 펼칠 공간을 확보 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어서 늘 고민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 해 왔었다. 때마침 영주 김정오가 나서서 오히려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뛰매 지성이면 감천이듯 봉화읍 삼계리에서 평소 소망하던 큰 꿈을 실천으로 옮길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임신년 4월5일 (음3월3일) 창고문을 열고부터 약 20여 일간 정리를 하고 4월24일 시화식을 거행함에, 봉화 군민 다수와 전국의 문화 애호가들의 박수를 받으며 7미터 대나무 막대에 목탄을 매어 스케치를 시작 하므로 작업은 비롯됐고, 이후 매일 정화수와 촛불을 밝혀 흐트려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지성을 다한 결과 임신 8월1일 일백일을 맞이했다.
청량대운도는 수많은 일화와 기적을 보이며 봄풀이 신록기를 거쳐 결실의 미덕으로 이어지듯 성장하다. 그동안 작업 현장을 보고 간 사람은 일천오백여명에 육박했고, 삼백여명이 방명록에 서명 했으며, 이백여명이 김치, 된장, 수박, 감자, 풋고추, 담배, 소주 등을 들고와 용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삼십여명이 현금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작가가 하는 일은 일할도 안되는 역할이요 나머지 구할은 동 시대에 살아 숨쉰 수 많은 사람의 몫이란 사실이다. 이는 청량대운도가 영원을 두고 침묵의 언어로 살아남을 힘을 스스로 가꾸고 있는 신의 영역이 아닐까 헤아려 진다.
참으로 절묘한 것은 꼭 필요할 때 자로 잰 듯이 모든 것이 있어주고 이루어지고 만나고 오고 가더라. 그 때 마다 나는 대작 앞 촛불에 무릅을 꿇고 기도했다. 그리하여 이 날을 기리기 위해 봉화군수 구태서님을 모시고 여러사람과 함께 안동 문화의 상징인 양반탈의 유동철이 이끄는 하회탈춤으로 축무를 올리고 화기를 남기는 바이다.

1. 신미년 겨울 청량산 구석을 뒤적이며 한달 보름쯤 스케치 할 때 천리길이 넘는 나주에서 김영길, 서울에서 조상재 내외분, 대구에서 한진해, 산청에서 정기호, 갈전에서 신승춘 등이 찾아와 위로했고, 축융봉에 올라 청량산의 비경을 마음껏 관조하며 산신제를 올린 후 하얗게 쌓인 눈길에 남긴 발자국 소리.

2. 바람이 심해 청량사 마당에 텐트를 치자고 했더니 보살님은 오산당이 비어있으니 그냥 쓰라고 했다. 사오일간 방안에서 취식하며 주변 스케치를 할 때 고시공부를 하던 이승용과 그 친구들은 “저들은 따뜻한 방안에서도 추워서 공부를 소홀히 했는데 야송선생님은 새벽같이 나가 어두워서야 매일 귀가 했고, 또 많은 스케치를 해왔습니다. 저들은 평생의 스승으로 생각할 기회로 삼고자 멀리 안동까지 나가 돼지고기와 소주를 사왔습니다.

3. 청량산 스케치 현장을 안동 MBC에서 4차례에 걸쳐 촬영했는데, 한번은 축융봉에서 해뜨는 모습과 아침안개를 찍자고 휴게소에서 자고, 어두운 밤 산길을 그 무거운 장비들을 들고 눈덮인 오르막 길을 엉금 기어오르며 비지땀으로 범벅이 되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4. 식목일 이후 20여일간 김정오의 번득이는 기지, 과감한 선택, 밀어붙이는 끈기로 깔판 300여개의 정돈, 비닐장판 깔기, 사료포대 1500여장 깔기 창고 안에 방 두칸 꾸미기, 목탑 만들기, 담요 깔기, 변소 만들기등 실로 땀이 마를 시간이 없을 정도 였고, 임승만도 열성 이였다. 전기 가설의 권용덕, 담장과 지붕 고치기에 장지택 사장 지휘로 10여명이 동원됐고, 읍사무소 새마을 계장 조현규씨 인솔로 11명이 동원되어 주변 쓰레기 두차분량을 실어내고, 현대철공소 서중만외 3인이 철문작업, 박재경의 페인트 칠, 춘양의 영림서에서 보낸 나무 30여 그루를 심고, 홍보실장 이교완이 보낸 모래 3트럭으로 기름때로 시커먼 마당이 해변처럼 밝아지다. 실로 150여명의 땀방울이 398평 창고에 떨어지므로써 큰 화선지가 조용히 펼쳐지다.

5. 시화식은 4월24일 오후 2시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 경과보고, 남규덕의 축사, 야송의 인사말, 천신제, 시필의
순이었다. 봉화 군민의 정성도 뜨거웠지만, 특히 순천의 양민정 목사, 나주의 김영길 내외분, 거창의 김태근, 서울의 이종호, 지성현 내외, 광주의 김성운, 박학자 이리의 김현중, 이달근 안동의 류한상, 손우영, 이해선, 안승걸, 윤옥순, 이운규 점촌시의 신상국, 신규애의 축하는 깊은 감동이었다. 한진해 내외분은 시화식 비용을 담당하고도 하루전에 와서 김정오 집에서 마을 부인들과 밤새워 음식을 장만했고, 집사람과 함께 구석구석 보살피는 정성을 다하다. 안동MBC 총무국장 김창홍은 뉴스 제작팀과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인솔해 와서 그날 저녘 아홉시 뉴스 테스크와 다음날 아침 일곱시 뉴스에 치밀한 계획으로 방영하여 영원한 감동으로 남게 하다.

6. 봉화읍의 김영준은 수시로 찾아와 매번 오렌지쥬스 한상자씩을 들고 웃음을 얹었으며 [청량대운도 화실]이란 대형 현수막을 제작하여 돋보이게 되다.

7. 영주의 박무배는 밤낮으로 밝히는 양초를 지금까지 끊지 않고 계속 사와 불을 밝히니 누가 그 지성을 닮을 수 있으랴

8. 삼계리의 장대운은 청둥오리알을 여러번 가져왔다. 소주를 매일 마셔야 하는 애주가로 나의 작업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가끔 술을 사들고 와 웃으며 건강을 살피다. ‘형님 최고야’로 시작되는 그 특유의 소탈한 말씨와 웃음은 화실을 노상 흥건하게 한다.

9. 여수의 엄도윤 편집국장은 부처님 오신날 전후로 나와 같이 부석사, 성불사, 비봉사를 두루 돌며 초대작의 성공을 한진해, 김정오 식구, 임승만과 함께 빌었고, 청량대운도의 제작 사실을 월간 [작은소리] 란 책에 무려 4페이지나 기록하였다.

10. 봉화군 홍보실의 권주연은 시화식장면부터 대작이 제작되어가는 과정을 십일 간격씩 사진으로 찍다. 이렇듯 체계있게 정리하는 장인 정신.

11. 한국청석문화 연구회장 조상재님은 청량대운도 작업 현장을 비디오로 제작했고, 손수 연출까지 하다. 표구비로 백만원을 내놓아 십여년 야송 그림을 사랑하며 지켜본 우의를 마음과 물질의 조화적 보시가 얼마나 큰의미를 지니는 가를 극명하게 하다.

12. 흰 화선지를 깔아 그 위에 긴 대나무 장대에 목탄을 매어 스케치 하던 둘째날 꿈에 관창의 학소대 암벽이 고기등뼈 처럼 치솟고, 그 좌우로 노오란 잔디밭에 붉은 단풍이 일렁거리고, 운무가 깊더라 해서 청량눌애도를 먼저 그려야 할 것 같아 진행하던중 도무지 생각대로 되질 않아 촛불앞에 만수향 한 개를 꽂아놓고 기도를 하는데 덕규 어머니와 집사람이 갑자기 놀란 비명을 지른후 어마마 산수화를 보세요 하기에 일어나 보니 과연 두줄기 연기가 신묘하게 산능선과 계곡을 그리며 운무까지 감지되게 흘러가는데 20미터 까지 이어져 창고안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김정오도 크게 놀라 저런 저런하고 말을 더듬고 권인숙도 손짓만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제서야 축융봉에서 정월초 하룻날 종일 스케치한 도본을 생각해 냈고, 즉시 펼쳐 놓았던 그 많고 많은 사백매의 종이를 걷어 치우고 다시 깨끗한 화선지를 창고 가득 펼쳐 스케치 하니 일사천리로 신들린 듯 그려져, 단 하루만에 목탄화도가 완성되다. 일주일을 애써도 안되던 청량눌애도의 밑그림에 비해 꿈만 같았다. 완성된 청량대운도의 하도는 만수향 연기가 흐른 산능선과 비슷했다.

13. 장인어른께서 일손이 모자라 마늘을 캘 사람 때문에 고생하니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집사람의 뜻에 아침일찍 김정오 차로 갈전으로 가서 오후 한시까지 마늘을 캐고 화실에 도착하니 촛불을 켰던 그 뚜꺼운 깔판이 탓고 촛불을 담았던 백자는 거꾸로 뒤짚혀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한 뼘 둘레의 비닐장판까지 사료포대가 깨끗이 타고 정화수 상밑까지 타들어 갔는데 어찌하여 그 왕성하던 불길이 그림에는 근접도 못한채 스스로 꺼졌을까 생각할수록 더욱 이해할수 없었다. 꼭 11시간 화실을 비운 것이다. 김정오는 누가 물을 부어 끈듯하다며 놀라와 하고 동곡 권용섭은 어찌 신이 없다 할수 있느냐며 놀라움에 놀라움을 거듭하며 사진을 수십장 찍다. 나는 또 엎드려 두 손을 모으고 그림 이외는 다른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받아드리고 이후는 창고 밖 출입을 절제하고 청량대운도 옆을 뜨지 않고 땀을 흘려 그림에 더욱 열중하다.

14. 성불사 법광 스님과 보살님은 시화식에 참석한 후 가끔 들려 축원해주다

15. 영남일보 이하수 기자는 수시로 화실에 들려 작업 상태를 기록하고 사진도 찍으며 술과 오징어 한 마리씩을 들고 와 늦은 밤까지 이야기 할 때가 있었고 현금으로 성의를 표하기도 하다.

16. 북부신문사 장찬덕 사장은 남상식 사진기자, 피재현 문화부장과 직접 현장 취재로 대서특필하다. 며칠 후 보내온 봉투의 겉봉에는 [청량대운도의 작은 디딤돌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고 씌어져 있었다.

17. 천리길이 넘는 예향 광주에서 3차례나 봉화 화실을 찾아 초대작의 성공적 탄생을 진정으로 바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는 뜨거운 정의 박학좌님은 천하 덮을 듯한 목소리로 “야송 소주 한잔 하세 힘있는 그림 한 장이 필요하네. 알동말동한 그 여운

18. 야송의 일이라면 열일을 젖혀두고 언제나 참석하여 지대한 도움을 주는 중,고등학생 시절의 김동길 우인은 홍복근전 봉화군수와 윤장원 행정계장과 같이 와서 격려함은 큰 용기로 오래 남을 추억이 될 것이다.

19.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황명희, 김종현 부부는 십여일마다 나의 작업실을 찾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온 정성으로 용기를 주려고 애쓰다. 특히 모시 한복 한 벌은 무더운 여름 작업에 절대적 힘이 되다.

20. 불변의 야송 후원자인 사촌동생 이홍좌는 전시회 때 마다 앞장서서 굳은 일은 도맡아 처리했는데 이 거대한 봉화의 화실도 대낮 같은 조도로 밝히려니 그 비용이 이백만원에 이르러도 기꺼히 부담하다.

21. 홍안의 역사 장지택은 만날 때마다 정이 넘치는 술자리로 많은 사람을 가까이 끌어 들이더니 안동호에서 잡은 61cm 월척이 아닌 두 월척 메기를 잡자 이 신통잖은 야송이 먼저 생각나서 봉화까지 갖고와 “선생님 건강이 우리들의 기쁨입니다.“란 외침은 차라리 야송의 눈물을 요하는 감동이다. 이 청량대운도가 이렇게 수많은 사연을 몰고온 알수 없는 큰 힘은 창고주인 지성현 선생이 국보가 탄생한다는 축하의 말 한마디와 베풀어 주신 은혜에서 비롯 되었음을 알고 머리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다.

대한민국 기묘생 야송 이원좌 1992년 10월22일